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모리 오가이 (문단 편집) == 군의관으로서의 행적 == 문학가로서의 그는 매우 뛰어났지만, [[군의관]]으로서는 [[일본군]] 내 [[각기병]] 환자 증가를 부르는 큰 실책을 저질렀다. [[19세기]]에서 [[20세기]] 초반 당시 일본군은 [[비타민 B1]] 결핍으로 생기는 [[각기병]]으로 고생을 하고 있었는데, 독일 유학파로 육군 군의관의 높은 자리에 올랐던 모리 오가이는 당시 의학계의 주류였던 각기병 병원균설을 지지했다. 사실 각기병은 전통적인 대처 방법으로 [[보리]][[밥]], [[메밀]] [[국수]] 등을 먹으면 낫는다는 [[민간요법]]이 퍼져 있었다. 그 당시에는 비타민이 발견되지 않았기에 원인 자체는 몰랐지만, 보리에는 [[비타민 B]] 성분이 들어있으며 경험적으로 이걸 먹으면 각기병이 나아진다는 것은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모리 오가이는 이를 당시 최선진 의학이었던 [[독일]] 의학에서 과학적으로 증명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신용하지 않았고, 심지어는 보리밥을 금지하는 명령을 내리기도 했다. 당시의 독일 의학계를 맹신한 것에 더하여, 모리는 평소부터 부하들에게 자상하고 그들을 배려하는 상관이었기에 부하들이 맛없다고 먹기 싫어 하는 보리밥을 병영식으로 삼는 것에 대해 반감이 있었기 때문에 보리밥 배식 금지령을 내린 것이기도 하다. 모리의 이러한 명령 때문에 [[러일전쟁]] 당시 육군에서만 25만명의 각기병 환자가 발생했고 이 중 약 2만 8천여명이 사망했다. 후술할 이유로, 이 환자 및 사망자는 거의 총원 육군이었다. 결국 전쟁 말기에 그 상황을 참지 못한 러일전쟁 당시의 육군대신 [[데라우치 마사타케]] 장군이 군의부의 의견을 깔아 뭉개고 흰쌀밥을 혼식으로 바꿨다. 완전 편성된 사단 1개(평시 상비 사단 2개)분이 각기병으로 사망했기 때문이었다. 가뜩이나 엉망인 징병 제도로 인해 당시 동원 인력의 1할만을 채우고 있던 일본 육군에게 있어서 1개 완편 사단의 병력이 전사도 아니고 질병으로 죽었다는 것은 극히 심각한 사태였다. 모리 오가이가 소속되었던 일본 육군과 달리, [[일본 해군]]에서는 이미 1884년 잡곡밥이 각기병 방지 효과가 있다는 것을 실험으로 증명하여 식단에 혼식을 넣어 각기병을 예방하고 있었다. 그런데 [[태평양 전쟁]]에서 결국 서로의 발목을 잡기까지 했듯이 [[일본군의 육해군 대립]]은 이미 이때부터 극심했던데다가, 이 방식을 시행했던 [[해군]] 군의관 다카기 가네히로가 [[영국]] 유학파였기 때문에 육군 군의관인데다 독일 유학파였던 모리 오가이는 일종의 자존심 싸움으로 받아들였고, 결국 병력 수만 명이 각기병으로 사망한 참사가 벌어졌다, 물론 이에 대해서는 사실 [[비타민]]의 존재와 각기병의 명확한 원인이 밝혀지기 이전이어서 모리 오가이로서는 과학적 근거에 의한 치료를 하려 했다는 옹호의 견해도 있다. 하지만 비록 당시로서는 과학적 근거가 없기는 했으나, 이미 경험과 임상례로 증명된 예방책을 지나치게 합리성이라는 함정에 빠져 사용하지 않았다는 점에서도 그가 책임을 면하기는 어렵다. [[과학만능주의]] 내지 [[과학적 회의주의]]를 신봉하다가 덫에 걸렸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런 입장에서는, [[과학적 방법론]]에 입각하지 않은 경험에 근거한 판단은 [[유사과학|유사의학]]에 불과하기 때문에 먼저 근거를 가져오라고 말하게 될 것이다. [[악마의 증명|입증책임은 주장하는 사람에게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해서]] 말이다.][* 21세기 현대의학에서도 정확한 메커니즘은 모르지만, 일단 효과가 있고 뚜렷한 부작용이 발견되지 않기 때문에 처방하는 약들이 상당수 있다.] 모리 오가이는 비타민의 존재가 밝혀진 뒤에도 죽을 때까지 자신의 견해를 철회하려 들지 않았다. 모리 오가이가 워낙 고집을 부린 덕분에 일본 육군의 군의부가 각기병의 원인이 비타민 B의 부족이며 이의 예방을 혼식 등 식단 개선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인정한 시기는 그가 죽고 난 1923년이었다. 정작 본인은 [[팥]]을 매우 좋아하다보니 각기병에 걸리지 않았다. 그렇지만 군의관으로서 공훈도 있다. 그는 일본 위생학의 개척자라는 평가를 받으며 그리고 당시 일본 의학계에 깔린 봉건적 구습을 씻어 버리는 것을 목표로 여러 차례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또함 [[히포크라테스 선서]]에 명시된, 의사로서의 사명과 윤리는 어기지 않았고 [[인체실험]] 및 민간인 [[학살]] 등의 전쟁 범죄에 가담하지 않았다. 실제로 어느 부하가 [[포로]]를 가지고 생체 실험을 하자고 건의하자 뺨을 치고 욕설을 퍼부었다. 다만 [[청일전쟁]]에서 여순 전투 직후 학살을 목격하기는 했다. 모리는 [[전쟁범죄|전장에서 여성을 강간하고 약탈하는 등의 행동]]을 엄청나게 싫어했다. 전쟁범죄에 대한 그러한 생각을 작품에서 드러내기도 했다. "쥐 언덕(鼠坂)"이라는 소설에 러일전쟁이 진행되는 도중 중국의 어느 마을에서 현지 여자를 강간한 후 살해한 기자가 등장하는데, 이 인물은 작품 내에서 부정적으로 묘사된다. 일본군은 전장에서 민간인 및 포로에게 각종 야만적인 만행을 저질렀는데, 모리는 그러한 일본군에 몸담고 있었으면서도 일본군의 만행의 대상 중 일부였던 무고한 민간인들이 얼마나 괴로웠을지에 대해 생각하고, 그러한 생각을 소설을 통해 드러냈던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